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낀 노동자들은 70년 전반기에 들어서면서 많은 민주노조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후반기에는 이러한 민주노조들이 성장하면서 박 정권의 심한 탄압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권익향상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로 우리나라 노동현실
전국의 대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1971년 4월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일어났고, 8월에는 대학 교수들이 대학자주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년 7월 7일에는 정권의 사법부 간섭에 반발하여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이 전원 사표를 제출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을 거듭한 노동운동은 전국노동자협의회(전노협)를 거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모순을 뜯어고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어깨위에 올려진 고통의 무게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음을 오늘의 현실은 잘 보여준다.
(2) 주요사건
노동’이라는 표제와 함께 ‘근로조건 영점…평화시장 피복공장’이라는 등의 부제를 달아 사회면 톱기사로 다루었다. 10월8일 전태일·김영문·이승철 3인은 삼동침목회 대표자격으로 8개항의 건의사항을 평화시장주식회사에 제출하였으나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내
'는 감정을 가졌지만 이 원시적인 감정이 전태일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애정이 깔린 직관이었고 머지 않아 그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생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막연하지만, 뭔가 끌어당기는 것을 태일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당시
1) 운동사적 의미
민청학련사건은 세 가지 중요한 운동사적 의미를 지닌다.
첫째, 이 사건을 계기로 공개적 독재체제로서의 유신체제의 성격이 확연해졌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공판 중 행해진 변호인의 발언을 문제삼아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법정 구속시킨 초유의 사건에 의해 증폭되었다. 둘째,
사건으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의 죽음이 세상에 던진 충격, 그의 죽음이 우리 민족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오늘 이 시점에서까지도 충분히 측량할 수 없다. 우리는 이 글에서 그의 생애를 통해 당시 노동현실과 그의 죽음 이후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분신이 한국 사회에 끼친
사건, KAL빌딩 방화사건 등 사회적 모순을 상징하는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그 위기는 더욱 심화되었다. 더우기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을 추진하면서 그 독재적 성격을 명확히 드러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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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1970년대의 실업문제
1970년의 소위 오일쇼크 이후 미국 노동시장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생활터전을 닦고 한인사회를 이룩했다. 이 가운데 한인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된 곳은 블라디보스톡(해삼위)이었다. 이곳에는 1893년에 이미 한인들의 밀집 거류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1907년에는 1만 400명의 한인들이 거주했는데 이는 블라디보스톡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였